참판공에 대한 자료를 찾고저 하였으나, 유감스럽게도 자료가 없었다. 세보에 의하면 공은 문종 1년인 1451년 문과에 급제한 것으로 되어 있어, 문과방목을 찾아보았고, 문과방목을 디지털화한 디지털한국학에 문의해 보았으나, 이득성이라는 이름을 찾을수 없었다.
그렇다면, 혹시 공은 문과급제자가 아니라, 무과급제자나 음보(蔭補, 음서제도로 관직에 오름.)로 출사한 것은 아닐까? 어느 회사에서, 무과방목을 컨텐츠로 출시하고 있다 하나, 무과방목이 출시가 안되었다 하였으니, 그때까지 한번 기다려 봐야 될듯하다. 그러나 단, 음보 출신이라면 이렇게 볼 수 있다. 참판공의 조부 10세 신(新)이 조선초에 전법령(정3품)을 역임하였으므로, 조선초기까지는 5품관 이상의 자손은 음보로 출사할수 있었으므로, 조부의 관직으로 음보로 출사할수 있었을 것이다.
공은 벼슬이 정언(사간원의 언관직)을 역임하시고, 단종조에 세상이 그릇되어감을 한탄하다가 관직을 버리고, 한양에서 삼척 남쪽의 교가로 이주하였다. 그렇다면 그 이전까지 공과 공의 3대조상의 거주지는 어디였을까?
세보에는 공의 부친 11세 관(寬)에 대한 기록이 호 이외에는 없다. 묘소의 소재지라도 나온다면, 많은 부분 도움이 될텐데, 그 마저도 기록이 전하지 않는 점이 아쉬울 다름이다.
공은 이후, 시문과 거문고로 시름을 달래며, 소일하였다. 참판공 묘갈명을 보면 중종 병오(1510년) 수자몽은(壽資蒙恩)으로 기록되어 있다. 뜻을 해석하노라면, "수(壽)로써, 자급(보통 정3품 이상)을 받는 은전을 받았다." 고 해석할수 있다. 조선 세종조 이후로, 70여세 이상 된 노인에게는 노인직(老人職)이라는 벼슬이 신설되어, 장수한 노인에게는 보통 70세 이상에게는 절충장군, 80세 이상에게는 통정대부, 90세 이상에게는 가선대부, 100세 이상에게는 숭정대부의 관직을 내렸다. 단, 이때에 노인직이 아니라, 실무직으로 6조의 판서를 역임하지 않은 이에게는 보국숭록대부 이상의 수직을 내릴수 없다는 규정도 있었다 한다.
가까운 사례를 몇가지만 본다. 도촌공의 손자인 녹전참판공 영(榮)은 1572년 80세에 통정대부에 올랐고, 1582년 가선대부로 승자하여 병조참판에 임명되었고, 통덕랑공의 후손인 충효공 상호(尙虎)는 1800년 99세에 숭정대부 행 동지중추부사의 벼슬을 받았다.
그렇다면 참판공 득성은 1510년에 노인직으로 통정대부의 벼슬을 받았다고 볼수 있다. 1519년 공이 별세하자 가선대부 이조참판에 바로 증직된 것 또한 그와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수 있다.(도촌공의 경우, 임응준 공의 상소로 철종 9년 1818년에 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겸 경연참찬관에 증직되었다가, 고종4년 1867년에 가증되어 가선대부 이조참판겸 동지의금부사에 추증된 것이다.)
이은영: 님 반갑사와요. 지금은 어떻게 지내세요? -[07/03]- 이석: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은영 님께서는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는지요? 지난번 뉴스를 보매, 태풍이 지나가서 물난리가 심하다 하던데.. 막상 귀국해보자 별무탈한듯 보였습니다만. -[07/11]- 이관준: 비온다 하더니만 하늘에서는 햇볕만 쨍쨍 내리쬐었더랍니다. -[08/04]-